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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보고 추억하기/여행 가고

찬란했던 기억의 편린들 - 랜선으로 유럽 추억하기

by 퓌비 2020.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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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우울한 날 일수록, 과거의 좋았던 기억에 집착하게 되는 듯하다. 이유있는?! 우울함 그리고 무기력함에 찌들어있는 요즘, (사실 그때도 무작정 좋지만은 않았던) 미화된 과거를 꺼내어본다. 동생과 다녀온 유럽여행은 우리끼리는 사골육수가 될 만큼 우려먹고 있지만, 정작 포스팅은 한 적 없으니 sd카드를 열었다. 

 

2018년 8월, 여름. 나름대로 많은 것을 준비해갔지만, 개인적으로는 놓친 것도 많았다고 생각. 하지만 놓친만큼 또 얻는게 있지 않았을까 위안해보는 나의 첫 번째 유럽여행. 굵직한 정보는 휘발되고 남은 건 사진과 사진으로 추억할 수 있는 기억들 뿐이다.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 앞에서.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맨 앞의 남자가 주인공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진을 전해줄 수 있다면 전해주고픈....)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던 트라팔가 광장. 정작 내셔널 갤러리 안에서 무엇을 봤는지는 정확히 기억도 안난다. 지금보다도 더 예술적 소양이 없던 과거의 나는 그저 눈으로 열심히 봤다.  


 

나에게 여행지 숙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적당히 깔끔하고 안전하면서 합리적인 가격인 숙소를 추구한다. 다만 2018년의 영국은 예년에 비해 너무나 더웠고 내가 지냈던 한인민박 숙소는 에어컨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부턴가 추위보다는 더위를 더 타는 사람이 되어 있었기에 그 날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돈지랄 일탈을 했다. 

 

내 여행 역사에는 한 번도 없었던, 숙소 당일 예약이라는 걸 해보았다. 아침만해도 그럴 생각이 없어서 잠옷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호텔 가운을 입고 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음 날 우아하게 네스프레소 한 잔을 내리고 테라스에서 창문 밖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네스프레소는 맛이 없어서 한 입 먹고 다 버렸고 네스프레소와 함께 여행의 초반인데,,,돈을 낭비했다는 죄책감도 날려버렸다. 

 


 

타워브릿지에서 영국야경 바라보기. 

 

보이다시피, 그렇게까지 인상적이지는 않은 야경이다. 하지만 내 뒷머리가 이렇게보니 길었었구나 생각하고, 이 날 길거리에 팔던 카라멜 땅콩이 맛있어보여서 사먹었다가 파리로 이동해야했던 다음 날부터 장염에 시달렸던 기억이 난다. 동생은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다가 냉방병에 걸렸었고 그게 나아갈때쯤 내가 장염에 걸렸다. 우리는 다행히? 번갈아 아파서 그나마 서로를 챙겨줄 수 있었는데 우리 엄마는 그냥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했다ㅋㅋㅋ 하긴 타지에서 딸 둘이 번갈아가면서 아픈데, 우리 엄마 성격에 얼마나 걱정했을까. 


그래도 어찌어찌 무사히 파리로. 

 

한 여름의, 그리고 날씨가 좋은 저녁 하늘 색은 다른 계절과는 다르다. 완전 검정색으로 어두워지기 전 어슴푸레한 남색 하늘. 오묘한 색만큼 내 기분도 오묘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오묘한 기분은 마음 한 켠이 뭉클해지는 그런 느낌이다. 나는 그런 느낌을 사랑한다. 에펠탑의 가장 아래 아치 부분이 황색 액자같고, 그 안에 담겨있는 하늘은 지금봐도 감동적이다. 내가 찍었지만 너무 잘 찍었다고 생각하는 사진 중 하나.


 

숙소와 에펠탑이 그리 가깝지 않았음에도, 화이트 에펠을 보려고 한 시까지 기다렸다. 누가 에펠탑을 기대이하라고 했을까? 나는 골드 에펠도 화이트 에펠도 그리고 낮의 에펠도. 보고 또 봐도 또 보고싶을만큼 좋았다.  

그리고 아래 놓여있는 자전거가 이 사진에서 신의 한 수. 

 


마치 화이트 와인인양 물잔을 들고 뒷배경은 날려버린 이 어설픈 사진이 좋다. 현지인들로 가득한, 트러플 파스타 맛집이었다. 해방촌 오스테리아 쿠촐로에서 먹었던 트러플 파스타를 생각하고 갔다가 훨씬 더 깊은 트러플 플레이버에 놀랐다. 꾸덕한 크림에 아낌없이 얹어진 트러플이 매우 감동적.

 

 


 

에펠탑 앞에서 이 사진을 찍으려고 내가 이 원피스를 사갔나보다. 생각보다 높은 턱에 올라가야해서 낑낑대기도 했고, 옆에 있던 여자들이,,,가방을 위로 올려두는 바람에 사이드에 계속 걸려서 빡쳤던 기억이^^;;; 

 


 

이건 제대로 얻어걸린 사진. 초점을 못잡아낸게 마치 멍불같다. 아니 이건 멍야라고 해야 맞는걸까. 센 강에서 바토무슈를 타며 갈 때는 노을을, 올 때는 야경을 감상했다. 시간대를 이렇게 잡은 건 내가 예약했지만서도 너무나도 잘한 일. 여기 사진엔 없지만 오르세 미술관도 센 강에서 야경으로 보니 또 다른 느낌으로 좋았다. 무튼 여기서도 에펠탑 못잃어...형체는 잘 보이지 않지만, 중간에 골드빛으로 솟아 있는 건축물이 바로 에펠탑이다. 


흔하디 흔한 스위스 국기가 꽂혀있는 융프라우의 사진이 아닌 이유는, 거기까지 가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십몇만원의 기차 가격을 지불하고 융프라우 정상까지 가서는...고산병 때문에 전망대의 음식점에 있는 의자를 붙여 누워있었다. 급격하게 어지럽기 시작했던 건, 문제의 얼음 동굴에 들어가고 나서ㅋㅋㅋㅋㅋ

 

내가 거기서 먹을 신라면을 얼마나 기대했는데...속이 너무 메스꺼웠고 배도 아프고 머리는 깨질 것같았다. 결국 관리요원이 와서 누워있는 나를 보더니, 특혜라면 특혜로 족히 한 시간은 줄을 서있어야했을 것 같았던 하행 기차에 나를 바로 태웠다. 그래서 결국 융프라우에서 1시간도 안되어서 로그아웃을...ㅠㅠ 고산병은 약이 없다고 했다. 무조건 내려가야한다고ㅠㅠ 그 때 같이 내려왔던 동생에게 뭔가 아직도 미안하다ㅋㅋㅋㅋ그냥 보고오라고 할껄ㅠㅠ 사실 그럴 기력도 없었다. 

 

그 뒤로도 스위스는, 그 해 이상기후로 너무 더웠던 날씨로 나에게는 그리 아름답지 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피렌체의 어느 전망대에서. 

 

붉은 벽돌 두오모들이 가득했던 낭만의 도시 피렌체.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고 옛날부터 막연히 가보고싶었던 도시 중 하나였다. 이래놓고 두오모에 결국 올라가지 않았던 그런 아이러니한 기억이ㅋㅋㅋㅋ 대신 두오모가 보이는 카페에서 만족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 번 올라가볼껄 하는 후회가 남는다. 최근에 알쓸신잡 유럽편을 다시 보고 있는데, 이걸 보고 갔으면 참 좋았을껄 생각한다. 브루넬레스키가 만든 돔에 꼭 한 번 올라가보는 날이 오길...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유럽은 야경이 인상적인 도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나마 야경이 좋았던 도시는 피렌체. 저 멀리 두오모가 보이고 잔잔히 펼쳐진 야경은 왁자지껄 워터파크가 아닌, 잔잔히 흐르는 호수같달까.


고생고생 개고생했던 이탈리아 남부 라벨로.

대부분 남부는 투어로 많이 가는데, 우리는 남부 중에서도 '하필' 환승을 여러 번 해야하는 라벨로 라는 도시를 둘이서만! 왔다. 효율성이라고는 제로였고, 라벨로를 오기로 했던 이유 중 하나였던 새벽 음악회는 우리가 마침 가는 날은 하지 않았다.

 

이런 악조건에도 너무 아름다웠던 안개의 도시 라벨로. 우리가 빌렸던 에어비앤비는 지대가 높은 곳에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저녁을 먹고 나서서 걸을 때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것들로 싸여 있던 장면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주었다. 이건 사진에 담기지도 않았는데 그 광경과 느낌이 생생하다.

 

그리고 사진은 라벨로의 정원, '빌라 침브로네'는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이 뷰만 하염없이 내려다 보았던 지난 날의 내가...부럽다.


친구들이 대부분 로마가 별로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내 스타일이었던 로마. 아니면 어쩌면 유럽의 마지막 일정이라 아쉬움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었을지도. 로마는 도시 안에서의 이동이 짧은 편이라 조금은 수월하게 여행했던 것 같다. 다양한 유적지를 보았지만, 그중에서도 콜로세움이 기억이 많이 남는다. 콜로세움 앞에서 나의 빨간 원피스는 빛을 발했다. 라라랜드 같지 않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역사나 미술이나 건축이나 뭐하나 제대로 알고가지 못했던 유럽여행이었는데 (제대로 알아봤던 것은 포토존과 쇼핑 그리고 맛집ㅋㅋㅋ)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동생과 생경한 유럽을 거의 한 달 내내 돌아다니는 것 그자체로 즐거웠다. 너무 무거웠던 캐리어와 컨디션 난조 그리고 탈 듯한 더위는 이제는 잘 기억이 안난다. 역시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며 여행 자체보다 여행을 계획하는 일, 그리고 다녀와서 여행을 추억하는 일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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