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빌려온 현대미술 작품들에 대한 글을 읽다가 궁금한 것들을 찾아보다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공부하게 되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공부한 것을 정리한다.
오브제: 앞으로 던져진 것. 기존에 사용되던 사고, 사상, 주체에 대립되는 무언가. 기존의 관념적인 연결 속에서 분리되어 일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상징적이고 환상적인 의미를 부여받은 것.
아방가르드(프: avant-garde): 근대 이전의 전투에서 가장 앞 열을 맡는 전위대를 뜻하는 군대 용어. 즉 제일 앞에서 돌격할만큼 어떤 일에 있어서 급진적이고 개혁적이라는 뜻. 예술에서는 기존의 전통과 고정관념을 깨고자 하는 급진적인 예술 사조를 의미함. 우리가 흔히 쓰는 전위예술, 전위적이다의 뜻도 아방가르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
> 유: 전위적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모더니즘이 내포하고 있는 이성중심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 경향의 총칭. 세계 대전과 근대의 냉전을 겪으며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기성세대가 만들어 낸 결과물에 대한 회의로부터 시작됨.
불가능성의 정리: 선호의 완전성과 이행성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회 후생함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캐네스 애로의 이론. 사회적 후생수준을 적절하게 평가할 수 있는 바람직하고 민주적인 선호체계가 존재할 수 없다.
해체주의: 파괴, 해체, 풀어해침의 행위적 관점에서의 부정적 경향이 강한 예술사조. 주어진 것으로서의 전체성, 즉 신이나 이성 등 질서의 기초에 있는 것을 비판하고 사물과 언어, 존재와 표상, 중심과 주변 따위의 이원론을 부정하고 다원론을 내세우는 경향.
>해체주의 건축의 거장 프랭크 게리의 LA 월트디즈니 콘서트홀
반달리즘: 문화유산이나 예술, 공공시설, 자연경관 등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행위를 가리킴. 4세기의 민족대이동 때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이 로마제국을 침공하여 로마제국의 문명을 파괴하고 약탈한 것에서 유래함.
민족대이동: 4세기 말 본거지를 떠난 훈족에 쫓긴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을 침입하면서 생긴 큰 변화. 민족대이동은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을 가져왔음. 민족대이동의 원인으로는 기후변화로 인해 훈족이 살던 중앙아시아 목초지가 말라버린 것과, 한무제의 훈족정벌정책을 꼽을 수 있음. 4세기에서 6세기까지 200여년 동안 이뤄진 대이동으로 훈족이 동유럽쪽으로 몰려오자 훈족에 쫓긴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을 침입하면서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야기함(476년)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멸망: 콘스탄티노플(같은 말로 비잔티움, 현 이스탄불)을 수도로 하는 로마제국을 동로마제국이라고 함. 330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때부터 동로마제국의 역사가 시작하여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함.
리비도: 정신의 거대한 무의식적 구조인 이드(id)에 포함된 본능적인 에너지. 프로이드는 이런 리비도의 충동이 초자아로 대표되는 정신 내부의 문명화된 행동 관습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 초자아는 사회에 순응하기 위해 리비도를 억제하며, 이는 개인에게 긴장과 불안으로 이어져 채워지지 않는 무의식적 정신 에너지를 다른 형태로 분산시키는 자기방어가 나타남.
자기방어: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속이거나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여, 감정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심리적 기제.
나의 궁금증이 리비도와 자기방어와 같은 위험한(?) 단어들에 도달하였을 때, 심상치 않아질 조짐을 느끼게 되었다. 이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건드리면 안되는데.... 프로이드라던가, 니체라던가, 부처 같은 사람들과 조우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인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십중팔구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 형이상학적인 말에 머리에 쥐가 나버리고 만다.
이쯤해서 그만 두고 잠이나 잘까 생각한다. 그런데 애초에 이런 삶에 하등 도움도 안되는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워낙 지적 허영심이 좀 있는 편이라, 아는 척 하기 좋아하고 괜히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외우려고 하는 이상한 성향이 있다. 그럼, 그런 성향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결국 나는 끊임없이 답을 찾는 중인 것 같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뭔가 항상 불안하다. 불안함도, 행복함도 다 내 마음안에 있다던데 어떤 사람은 가난해도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부자여도 불행하다던데 마음에 대해 좀 알면 나을까? 그럼 좀 더 공부해야겠네. 참고로 특히 여기서부터는 내 생각이 매우 듬뿍담겨있다. 전혀 객관적이지 않고 완전 주관적임을 미리 알려드린다.
이런쪽에선 동양이 서양보다 훨씬 빨랐다. 또 의식(마음)에 관해선 불교를 빼 놓을수가 없다. 대승불교의 큰 줄기 중 하나인 유식학에서 마음에 대한 불교의 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 유식학에선 인간의 의식을 8개로 나눈다.
안이비설신의(감각적 의식 6개) + 말나식,장식(잠재적 의식 2개)
-안이비설신의 +식을 붙여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낀것을/ 머리로 생각함으로서 생기는 의식이다.
-말나식: 표층 의식 바로 밑에 있는 잠재의식으로 얕은 무의식 쯤...(무의식에 얕은게 있나..???)
-장식: 가장 심층적인 무의식이다. 이때 '장'은 영어로 'store' 즉 저장한다는 의미. 가장 심층적인 무의식은 위의 감각적 의식 6개로 인한 모든 경험의 저장된 것이라는 뜻이다.
굉장히 인상적이다. 서양에서 이쪽 분야의 권위자인 프로이드의 이론보다 한 1000년은 빠를텐데, 프로이드의 이론과 유사한 점이 많다. 프로이드가 영향을 받은건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잠재의식의 근원이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모든 것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참 음미할만 하다.
프로이드의 생각은 좀 다른 듯 하다. 프로이드는 무의식의 주된 구성요소로 본능적 욕구(위의 리비도)를 꼽고 있다. 원초적이고 본능적 욕구(예컨대 성적) 뿐만아니라 과거의 트라우마나 기억, 결핍, 콤플랙스 등도 무의식의 구성요소로 꼽는다. 물론 많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무의식이 본능적 욕구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은 아마 모두 인정하지 않을까?
프로이드에 대한 얘기에서 좀 멀어지는듯 하지만, 요즘 읽고 있는 책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진화론 내지 진화심리학적 입장을 엿볼 수 있는데,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도킨스는 유전자 단위에 대한 자연선택설을 주장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설계된 생존 기계라는 것이다. 그에 따라 의식을 생존과 번식을 위해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최선의 진화적 전략을 결정하는 시스템으로 간주한다. 이런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 의식의 심층(무의식)에 생존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욕구들이 있다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선 행복이란 생존에 유리한 환경에서 주어지는 감정적 보상일 뿐이며, 생존과 번식의 욕구는 모든 행동의 기반이 된다. 인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이성적이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무의식에 욕구만 있을까?
칼 융은 집단적 무의식을 주장한다. 이 집단적 무의식은 인류가 쌓아온 수 많은 상징과 기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상징과 기호들이 인간을 치유하고 성숙하게하며 자아실현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주장한다. 여기까진 좋은데 융의 이론은 난해(?)한 부분이 있다. 너무 종교적(?) 이랄까..? 융은 꿈을 통해 무의식이 내면의 부조리를 극복하고 심지어 미래를 예견하기까지 한다는데... 심지어 이 무의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집단적인 나에게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 어딘가로부터 온다는....(갑자기 전대통령님의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가 생각나...) 모르겠다. 이런 부분은 도저히 받아드릴 수가 없다.
여기서 원효대사의 깨달음을 생각해보자.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무덤 앞에서 노숙을 하다가 목이 말라서 바가지에 담긴 물을 먹었다. 아주 꿀맛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깨보니, 해골 바가지에 담긴 썩은물을 먹은 것이다. 나였으면 헛구역질을 했겠지만, 원효대사는 그 순간 깨달음을 얻어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다. 그 깨달음, 우리가 익히 아는,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 믿음. 믿음은 참 교묘하다. 꿈이 미래를 예지하고 나를 이끌어줄 메시지를 준다면, 내가 그렇게 마음먹은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꿈이 주는 메시지가 먼저인가? 내가 꿈이 아무 의미 없다고 믿는다면 꿈은 내게 아무 의미 없을테니 거기서 어떤 의미도 못 느낄 것이다. 내가 꿈이 엄청 의미있다고 믿는다면 이미 어떤 꿈이던 나에게 다 의미 있게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먼저인가? 본질이 먼저인가? 본질이 있기는 한건가? 그래서 선무당이 사람잡고, 적당히 깨우치면 파계승이되고, 사이비가 그렇게 많나 보다. 의식으로 의식을 공부한다는건 눈으로 눈을 보라는 것과 같은 것 아닐까? 어려운 일이다.
본질에 대한 고찰은 차치하고 융의 이론에서 상징과 기호라는 단어에 관심을 기울여야한다. 철학에서는 이 단어들이 사람 미치게하는 주범들 중 하나니까. 라캉은 상징과 기호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 중 한 명이다. 라캉에게 자아란 가상적 이미지이며 주체란 실체가 아닌 기호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런 자아 형성의 과정을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이때 거울단계라는 라캉철학에 중요한 개념이 있는데, simple is the best를 맹신하는 나에게는 불필요한 가정이 많이 필요한 불필요한 단계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거울단계는 굳이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말을 뭘 대따 어렵게 써놔서 도저히 비루한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되니, 그냥 내 멋대로 해석 하려고한다!!
내 멋대로 해석에서의 라캉 철학의 핵심은 '언어'이다. 언어는 우리가 마음으로 지어내는 모든 것의 재료가 된다. 따라서 언어는 가능성인 동시에 한계이다. 설계도를 실현 가능성을 불어넣는 것도 재료지만, 설계도를 물질계의 한계 속에 가두는 것도 재료다. 어떤 사고 수준도 언어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다. 마찮가지로 어떤 욕망도 언어를 거치지 않고는 내·외로 표현될 수 없다. 하지만 유아기에는 언어를 알지 못한다. 유아의 세상은 표현되지 못할 원초적 본능과 욕구들로 이뤄져있다. 상상계의 세상이다.
언어를 배우며 정제되지 않은 원초적 본능과 욕구들을 상징과 기호 체계로 정의해 나가는 것. 이 세상이 상징계의 세상이다. 자신 속에 들끓는 원초적 본능에서 사랑, 소유, 애착 같은 기호로 정의된 욕구들로 정의해나간다. 하지만 상징계는 상상계를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없다. 또 불완벽한 나를 완벽한 상징에 동일시 할 수도 없다. 그 과정에서 상상계와 상징계가 어쩔 수 없이 타협하며 만나게 되는데 그 지점이 바로 실재계이다. 따라서 실재계는 어디에나 '실재'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만 '실재'한다. 상상계는 상징계로 통해 이해되고 상징계도 상상계를 통해 이해된다. 상징계가 없으면 상상계도 없고 실재계도 없다. 사회와 아무 접점도 없이 오직 원초적인 욕구만 가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 사람에게 실재가 어딨을까?
이렇게 나름대로 정리해보았지만, 여전히 '이렇게 살아야 되겠구나~'하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유식학부터 라캉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얘기인 듯 조금 다른 얘기들을 하는데, 공통점은 발견할 수 있다. 다들 욕망을 '충족'한다고해서 그게 '만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끝없는 욕망과 결핍된 현실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을 것인가에 대한 해법만 다른 것이다. 소유에 집착과 애착이 많은 나지만, 앞으로는 조금 내면과도 대화를 나눠봐야 겠다. 사람이 다르듯 사람마다 가진 균형점들도 다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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